레이먼드 카버 - 대성당
Book공작이 푸드덕댔고 노란 귀는 잘렸으며 카버는 퓰리처상의 후보에 올랐다.
나는 단편 소설을 자주 읽지 않는다. 접하는 계기 자체도 많이 없었고 소위 ‘문학’에 도전하겠다 하면 어지간해서는 장편 소설을 잡게 된다. 집 책꽂이에 [대성당]이 있었다는 것도 이번 달 들어서야 알게 되었다. 곁눈으로도 본 적 없었던 검은 책이었다.
‘북클럽에서 [대성당]을 읽는다’고 했을 때 어머니가 비웃으셨다. 당신도 북클럽에서 그 책을 다뤘는데, 정 말 재미없었다고. 책에서 교훈과 삶의 의미를 찾는 것이 낙인 당신은 해설을 읽어도 거둬갈 교훈을 못 보셨다고. 예전에 어머니께서 넌지시 투덜대셨던 ‘공작이 집 안을 돌아다니고 못생긴 아기를 보자마자 갑자기 임신하기로 한 커플’ 에 대한 이야기를 내가 드디어 읽게 되었다. 대놓고 말하겠다. 피는 못 속인다고, 소설 속 큰 것 한 방을 원하는 나에게도 진짜 재미없었다. 그런데 비슷한 분위기의 소설들을 꾸준히 거치고 나니까 나름 흥미가 붙기 시작하더라.
[대성당]은 하나의 크로키북이라고 느꼈다. 전시회를 위해 출품하는 ‘작품’이 아닌 일상의 조각들. 그것도 꾸미지 않은 날것의, 거친 목탄 선이 더럽게 짓뭉개진 크로키 모음. 호흡도 정말 짧다. 뭔가 일어나기를 기대하다 보면 이미 회색 간지가 보인다. 재미를 찾기보다는 이야기 자체의 자연스러움을 삼켜보는 게 이 책을 읽는 방법이라 생각된다.
한 번도 자전적인 것을 쓴 적은 없지만, 내 작품은 대부분 나 자신에 대한 것들입니다.
카버의 단편들을 하나씩 읽어 나가면 날것의 미(美)에 감복하면서도 어느 순간 가슴 한켠이 미적지근하게 따뜻해진다. ‘누군가’와 마음이 통하는 장면들이 간간이 등장하는데, 그 장면에서 이상한 안도감을 느끼게 된다. [별 것 아닌 것 같지만, 도움이 되는] 에서 얼굴이 길바닥에 거꾸로 쳐박힌 아이의 묘사에 혀를 차다가, 독자의 입장에서는 너무 뻔한 전화상대의 단말마에 답답함과 초조함을 느끼다가, 부모와 롤빵을 먹으며 나도 속으로 울어버린다. [대성당]의 찝찝한 질투심에 불안하다가도 볼펜 선을 따라 갑자기 웅장한 종소리를 듣는다. 이 단편집의 미는 이런 것이다. 덧없어보이는 삶에도 감정의 둑은 터지게 되고, 사람은 사람을 어느 정도 이해하게 된다. 더럽게 인간적인 것이다.
이 따뜻한 듯 구릿한 리얼리즘으로 가득한 책을 덮으니 어째 입꼬리가 께름칙해지면서도 내 삶은 어떤 소설의 시놉시스를 그리고 있을까-라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