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랭 드 보통 - 불안 : 꼭 나쁘지만은 않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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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안


‘안정감’이라는 것은 어떤 상태일까. 건강한 자기통제란 무엇이며 나는 나에게 어느 정도까지를 바라며 살아야 하는가. 꾸준히 나 자신한테 물어봐왔지만 아직까지 답이 나오지 않는 질문들이다. 안정적인 마음을 가져야 행복하다는데, 불안한 나는 불행한 사람일까? 불안이란 것은 꼭 나쁘기만 할까?


\[자존심 = \cfrac{이룬 것}{내세운 것}\]

작가는 자존심에 대한 얘기를 꺼낸다. 자존심이 낮으면 불안해진다고 한다. 여기서의 ‘자존심’(Self-esteem)은 ‘자존감’과 결을 같이 한다고 판단된다. 자기에 대해 가지는 태도라는 뜻으로 읽히며 사회적인 지위와 밀접한 관계를 가진다.
자기의 능력에 대한 자신과 소속 집단에서의 시선을 기반으로 하고 있어서 자기 모습을 받아들이는 ‘자존감’ 말고도 자신의 능력치와 관련된 ‘자아효능감’과도 어느 정도 통용될 수 있을 것 같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불안은 결코 나쁜 것이 아니라 생각한다. 사람이라면 어느 정도의 불안감은 늘 가지고 있다. 건강한 회복탄력성과 자존심의 성장이 뒷받침된다면 불안을 객관화하며 삶의 방향성을 잡아나갈 수 있다.

건강한 척 이런 말을 꺼내긴 했지만, 나는 아직 높은 불안 강박을 가지고 있다. 이렇게 글을 적어가며 마음을 다잡고 행복 회로를 돌리는 거라고 여기면 좋겠다.


이전의 나는 자존감이 매우 낮았다. 소위 말하는 천재들과 같이 학교를 다녔고, 하필이면 걔네와 친했다. 난 그들과 비교하면 학과 공부에 있어서 너무나도 뒤쳐지는 사람이었다. 그때의 난 소속감에 대한 불안이 컸다. 내가 잘나질 못했으니 좋은 사람이어야 한다 생각했다. 멍청이는 착하기라도 해야지. 남에게 맞추려고 했고, 눈치를 많이 봤다. 자기 의견은 묵살했다. 왜냐면, 나는 못났으니까.

다른 사람이 우리를 바라보는 방식이 우리가 스스로를 바라보는 방식을 결정하게 된다.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느낌은 함께 사는 사람들의 판단에 좌우된다.

그 소속을 벗어나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알고보니 나는 나름 잘난 놈이었다. 내가 정의내린 만큼 나는 멍청하지 않았다. 비위를 맞추지 않아도 사람들은 나를 좋아했다. 똑똑하고 일을 잘한다는 수식어가 붙었다. 예전에는 그런 칭찬을 들었을 때 부정부터 튀어나왔는데, 어느 순간 뿌듯해졌다. 자아효능감이 높아졌다는 방증이었다.

우리가 실패에 대한 생각 때문에 괴로워하는 것은 성공을 해야만 세상이 우리에게 호의를 보여준다고 믿기 때문이다.

이직과 동시에 직무 전환을 하고 나서는 ‘실패’에 대해 불안했다. 내가 쌓아온 평판을 한 순간의 실수로 말아먹지는 않을까 긴장했다. 세상이 보여준 호의가 한 번의 실수로 사라질까봐 두려웠다. 그러나, 정말 감사하게도 이 부분에 대해서 용기가 많이 생겼다. 회사 사람들은 실패에 관대한 사람들이었다. 피드백이 있을 수는 있지만 그 피드백에 감정적인 짓누름이 없었다. 오히려 내가 어떻게 실수를 보완할지에 대한 격려가 돌아왔다. 내 자신에 대한 자신감이 붙고, 자존감이 올라갔다.

최근 들어서는 ‘관성’에 대한 불안감이 엄습해왔다. 사회 초년생에서 생초짜 티를 벗게 된 지금, 나는 내 연차만큼의 몫을 하고 있는가. 내가 지금까지 내 자신을 입증한 그 수준을 앞으로도 계속 유지할 수 있을까에 대한 불안이다. 재미있게도 이 불안이 마냥 불쾌하지만은 않다.

윌리엄 제임스는 우리가 하는 모든 일에서 성공을 거두어야만 우리 자신에게 만족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또 어떤 일에서 실패한다고 해서 반드시 수모를 느끼는 것은 아니다. 우리의 자존심과 가치관을 걸고 어떤 일을 했는데 그 일을 이루지 못했을 경우에만 수모를 느낀다. 무엇을 승리로 해석하느냐, 무엇을 실패로 간주하느냐를 결정하는 것은 우리의 목표다.

내가 하는 업무 자체에 자존심과 가치관이 걸리게 되었다는 뜻이다. 내 밥그릇도 제대로 찾지 못했던 몇년 전에 비해 얼마나 큰 발전인가!

앞으로는 어떤 불안감이 나에게 다가올지 기대된다. 나에게 불안은 인생의 한 단계를 넘을수록 업데이트 되는 새로운 퀘스트 같은 거다. 그렇게 받아들이려고 한다. 내가 한 부분에서 온전해지면, 그 부분에 대한 상대적 기준이 충족되면서 다른 창구가 열린다. 나는 욕심이 많은 사람이라 더 ‘높은’ 곳을 갈망한다. 더 ‘성숙한’ 내가 되길 소원한다. (‘내세운 것’을 결코 내려놓을 수 없는 자신이 ‘성숙하다’고 부를 수 있을까 싶다만.) 나는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는 것의 증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