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의 기원 - 서은국 : 부끄럼 많은 생애를 보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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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의_기원

이렇게 ‘becoming’에 눈을 두고 살지만, 정작 행복이 담겨 있는 곳은 ‘being’이다.


나는 참 지독한 삶을 살아왔다.

서울 8학군에서 초, 중 고(0.15%)를 나왔고, 내가 즐기는 공부가 아닌 ‘쟁취하는’ 공부만을 해왔다. 미국으로 가서 ‘배움’ 자체에 흥미가 생길 때쯤 졸업이 찾아왔다. 내가 뭘 하고 싶은지, 내가 뭘 좋아하는지 눈 뜨지 못한 채 대학도 ‘미래가 보장되고’ ‘유망한’ 대학을 선택했다.

그런 삶이 행복했냐? 행복했을 때도 있고, 행복하지 않았을 때도 있었다. 무언가를 달성하면 행복했다. 누군가를 밟고 일어나 승기를 쥐면 행복했다. 시험이 끝난 것만으로는 행복하지 않았다. 시험에서 좋은 점수를 받으면 그제서야 행복했다. 나는 성취지향적인 결과주의자가 되어 있었다.

그것이 정녕 ‘행복’이었을까?

“행복해-“ 보다는 “즐거워-“가 더 편했다. 나는 행복을 궁극의 목표로만 바라봐왔지, ‘소소하지만 확실한 행복’이란 게 뭔지 알아볼 노력을 하지 않았다.

‘행복감’ 인식의 부재는 사회인이 된 지금도 오랫동안 나를 괴롭히고 있다. 지금은 싸우며 살고 있지 않느냐? 전혀. 오히려 인생 개척의 주체가 오롯이 내가 되어서 더 불안해하며 살고 있다. 길가의 꽃을 바라보며 흐뭇해하기 전에 어떻게든 목표를 정해 달려야지 마음이 평온해진다. 매일 4시간 정도 수면을 하는데, 오후 7시쯤 되면 감겨오는 눈을 부릅뜨면서 잠을 쫓는다. 그래도 잠은 자야 하니 커피는 마시지 못한다. 불확실한 미래를 고민하다 공포감에 머리가 맑아지면 그 뿌듯함이 너무 즐겁다. 이것이 나에게 있어서의 행복인가?

서은국 작가의 말을 빌자면 어느 정도는 행복이었다.

행복은 추구한다고 얻어지는 결과가 아닌, 살아가는 과정 그 자체라고 한다. 살아가는 과정에서 얻어지는 만족감을 우리 뇌는 행복이라고 치부한다는 것이다. 생존을 하고 결속감을 느낄 수 있는 행위들과 그 사회적인 결속에서 나오는 쾌감이 행복이라고, 선사 시대부터 호모 사피엔스의 DNA에 적혀 있다고 한다. 어느 정도는 행복이 맞았다. 내가 악착같이 특정 그룹에 들어가 버티고, 내 가치를 증명받는 것들도 하나의 행복이었다. 뭔가를 달성함으로 인해 내가 속한 네트워크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으니, 나는 나름대로 행복했던 거였다. 과거를 더이상 불행했다고 치부하고 암흑의 나날들로 돌리지 않아야겠다.

그렇지만, 하나의 헛점이 있다. 너무 ‘성공’만을 막연하게 쫓아서 달려왔다는 것이다.

성공하면 당연히 행복해지리라는 기대를 하지만, 실상 큰 행복에 변화가 없다는 사실은 살면서 깨닫게 된다.

많은 사람이 돈이나 출세 같은 인생의 변화를 통해 생기는 행복의 총량을 과대평가한다. 그 이유 중 하나는 바로 이 행복의 ‘지속성’ 측면을 빼놓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성공과 성취를 행복으로 엮지 않아야 하겠다. 내가 속해 있는 사회적 그룹을 유지하되, 너무 큰 도전을 하려고 애쓰지 않는 것이 좋겠다 싶다. 무언가를 달성하는 순간을 그리기보다는 하루하루 최선을 다하는 것이 나에게는 행복이라는 것을 인지해야 한다. 정작 행복이 담겨 있는 곳은 ‘being’이니, 커다란 행복의 달성을 기대하지 않고 ‘생존’ 자체를 행복하게 느끼도록 노력해야 한다.

이 책을 통해 또 하나, “행복은 기쁨의 강도가 아니라 빈도” 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행복은 궁극적인 목표이니 다른 것은 행복과 연관되지 않는다고 생각했던 것을 반성한다. 따지고 보면 기분이 좋고, 내가 이 사회에서 나로 존재할 수 있는 포근한 순간들이 있었다. 나는 그것을 중요치 않다고 판단했다. 지나가는 유약한 감성 모먼트라고 생각했던 걸까? 내가 나에게 너무 엄격했던 거다. 나는 그런 작은, 빈도높은 행복들이 있었기에 지독한 삶을 살아도 지금까지 미치지 않았던 걸지도 모른다.

나는 큰 기쁨이 아닌 여러 번의 기쁨을 찾을 거다. 노력할 거다. 나를 기쁘게 하고 나를 사회에 있게 해주는 작은 ‘소확행’들을 찾아보는 것이 중요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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