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라카미 하루키 - 직업으로서의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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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온한 교외 주택가에 거주하고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는 건전한 생활을 하고 날마다 조깅을 거르지 않고 야채샐러드 요리를 좋아하며 서재에 틀어박혀 매일 정해진 시간에 글을 쓰는 작가라니, 그런 건 실은 아무도 원하지 않는 게 아닐까. 나는 세상 사람들이 품고 있는 로망에 쓸데없이 찬물을 끼얹고 있는 건 아닐까,


3권 이상 되는 장편소설을 쉴 틈 없이 읽어본 것은 처음이었다. 2011년의 겨울, 시애틀의 고모댁에 놀러가서 한 주 지냈을 때였다. 영어 책에 짓눌려 뭐라도 한국어를 찾아 읽고 싶었고, 우연히 [1Q84] 1권을 펴들었다. 조지 오웰의 풍자소설이라도 되려나, 적당하게 시니컬함이 들어찬 17살의 나는 그렇게 하루키를 처음 만났다. 소설의 줄거리를 채 파악하기도 전에 책을 덮고 방으로 들어가 문을 걸어잠궜다. 접해보지 못한 성인물 소설이었던 것이다. 지금까지 내가 읽었던 소설은 다 동화(童話)였구나. 한발짝 어른에 가까워지는 것을 느끼며 조마조마하게 책을 읽어나갔던 것이 기억난다. 그 불안함은 이내 스토리라인에 휘말려 대담해지고 밤을 새워 전 3권을 독파했다. 학교에서 떠먹여주는 고전을 떠나 처음 접해보는 현대소설이었고, 판타지 소설이었으며 복선 회수까지 깔끔했다. ‘와, 미쳤다.’ 는 소리가 나왔다. 하루키의 팬이 되었다.

같은 책장에 꽂혀 있었던 [상실의 시대]는 [1Q84]만큼 심금을 울리진 않았다. 너무 현실적이어서일까. 상실의 시대, 즉 노르웨이의 숲이 하루키의 베스트셀러라는 것이 좀 의아하긴 했으나, 취향은 존중하는 것이라 배웠다. 말이 그렇지만, 재밌었다. 학교에서 당시 읽게 한 책인 [위대한 개츠비]가 줄거리 사이에서 튀어나오는 것을 보고 뿌듯했던 기억이 난다.

[직업으로서의 소설가]는 회사 동료분이 추천해준 책이었다. 내가 한창 신입 딱지를 벗고 1+년차가 되어 자기 발전에 미쳐있었을 때였다. 추천사는 ‘무언가의 장인이 되려면 꾸준함이 필요하단다.’

하루키 = 소설 이라는 시각만 갖고 있었는데, 에세이도 이렇게 편안하게 쓸 수 있다는 것에 어느정도 감복했다. 이렇게나 대단한 사람이 동네 아저씨마냥 내 옆에 앉아서, 살아가는 방법을 잔잔하게 얘기해주는 것을 듣는 느낌이었다. 좀 더 거만해져도 될텐데, 많은 성취들을 운의 덕으로 돌리고 자신의 부족함을 내세우는 하루키에게 장인정신을 느꼈다.

하지만 소설을 쓴다는 직업에 관해서 말한다면 나는 하루에 다섯 시간쯤 책상을 마주하고 상당히 강한 마음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기초체력은 중요하더라. 나는 지금까지 밤샘이나 집중을 하는 것에 대해 크게 힘든 적이 없었다. 나는 내가 밤을 잘 샐 수 있는 이유가 ‘정신력’에 있다고 생각했다. 시험이나 마감이 눈앞에 닥치면 온몸이 차가워지고 어떻게든 몰두를 하게 되는 것이다. 체력이 부족해서 밤을 새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최근 들어 알게 되었다. 밤이 되면 눈이 감겨서 집중을 못하겠다나. 정신이 약해빠졌다, 내가 30분마다 깨워주겠다-고 말을 했음에도 그 친구는 1시를 넘기지 못했다.

책을 추천해준 동료는 ‘30’을 조심하라고 권고했다. 30살이 되면 오래 쓴 아이폰마냥 최대 체력 충전도가 떨어진단다. 그 전에도 운동을 해서 체력을 쌓아두고, 그 이후에는 생존을 위해 꾸준히 움직여야 한댔다.

테니스를 접하게 된 것은 올해 들어 정말 감사한 일이다. 이것이 하루키가 말하는 ‘물때’려나?

모든 일에는 ‘물때’ 라는 것이 있고, 그 물때는 한번 상실되면 많은 경우 두 번 다시 찾아오지 않습니다. 인생이란 때때로 변덕스럽고 불공평하며 어떤 경우에는 잔혹한 것입니다.

인생은 불공평하다. 신이 사람을 만들땐 공평하게 만들었다고들 하지만 인생 자체는 더럽게 편파적이다. 운명을 빙자한 ‘물때’가 너무 많이 지나간다. 그 물때는 파도만 같아서 지나가고 나면 그것이 뭐였는지조차 보이지 않는다. 운명을 믿지 않고 위험회피 기질이 강한 나는 뭘 하던 보장된 것에 도전하는 것을 좋아한다. 나에게 ‘물때’ 는 하나의 도박이라 받아들여지고, 그 물때를 타지 못했을 때의 상실감 및 실패를 메꾸는 방법을 고민하면 괜히 착잡해진다. 물때를 잘 타도 왠지 부끄럽다. 인생 거저먹는다는 생각이 들어 떳떳하지 못하다.

이렇게 회의적인 나에게도 ‘운이 좋았다’ 는 몇가지 인생사가 있었다. 내 능력을 넘어서서 정말 운이 좋았기에 이뤄낸 포인트들이 있다. (‘운이 좋았고 나는 그만한 능력이 없었다’는 말이 가면 증후군의 한 증상이라는 걸 최근에 들었다. 내가 제때 탄 물은 나의 능력인 거다. 그렇게 믿어야 건강하다.) 어느정도는 운명이란 것을 믿어보고 어색한 것에 기대해보는 자세가 필요해보인다. 내일은 로또나 한 장 사볼까.

모두를 즐겁게 해주려고 해봐도 그건 현실적으로 불가능하고 오히려 나 자신이 별 의미도 없이 소모될 뿐입니다. 그러느니 모른 척하고 내가 가장 즐길 수 있는 것을, 내가 하고 싶은 것을, 내가 원하는 방식으로 하면 됩니다.

장인의 법칙 한가지 더. 내가 즐길 수 있는 것을 하라. 위의 ‘다섯 시간쯤 책상을 마주하는’ 얘기와 맞물린다. 체력과 동시에 ‘몰입’의 중요성이 강조되는 것이다. 태생적으로 아무 분야에나 몰입을 잘 하는 사람이 분명 있다. 그런 사람은 어떤 의미에서의 천재로 이름을 날리고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대다수의 사람은 그만큼의 열린 마음을 가지고 태어나지 않더라. 나도 그 중 하나고.

내가 지금까지 ‘원해서’ 밤을 새 본 분야들이 몇가지 있다. 그 중 하나로 그림이 있다. 타블렛을 사지 못했던 시절 마우스로 일러스트 뮤직비디오를 만들었던 중학생의 하룻밤이 기억난다. 700여장의 일러스트를 하룻밤 꼬박 새워 그려냈었다. 오전 6시까지 밤을 새서 그림을 그리고 가족들에게 들킬까봐 자는 척 하다 등교했다. 하나도 피곤하지 않았다. 체력의 문제가 아니었던 것 같다. 너무 즐거웠고, 뿌듯했다. 물론, ‘몰컴’으로 인한 아드레날린 과다 방출도 한 몫 했겠지만.

내가 개발직으로 전향했을 때, 스스로 걱정했던 부분 중 하나가 ‘내가 이 분야를 정녕 좋아할 수 있을까’였다. 학부 때 울며 겨자먹기로 했던 코딩 과제들, 자존감 꺾여가며 개발천재들과 비교하며 다녔던 것이 뼈에 사무쳐서 개발직이라고는 도전조차 하지 않으려고 했는데. 내가 원해서 밤을 새며 일하고 있다. 하루키의 ‘나는 학교 체제가 싫어요’와 비슷한 결이려나, 점수가 부여되는 과제가 아닌 내 스스로 제품을 만들어나간다는 프로젝트성 업무가 적성에 나름 맞는 것 같다. 세네시까지 맡은 업무를 쳐내는 것 자체가 즐겁다 느껴진 때가 있었다. 조금 소름이 돋았다. 뿌듯하기도 하고. 인간은 과거를 뛰어넘어 발전하는 생물이구나.


소설가의 꿈을 가져본 적도, 글을 쓰는 것에 천직을 느끼고 재밌다 느껴본 적도 없다. 그 방향성에서의 [직업으로서의 소설가]은 애석하게도, 하나도 공감이 되지 않았다. 나의 독자가 누구며, 내가 왜 글을 써야 하는지, 뭘 써야 하는지 알 게 뭐람. 내가 신춘문예에서 발굴되는 날이 온다면 내 고양이에게 (운명적으로!) 날개가 돋아 하늘을 날아다니고 있을 거다. 그렇지만 [장편소설의 장인으로서의 하루키]는 충분히 곱씹을만 했고, 책을 덮고 나서 실천할 거리를 받아들 수 있었다.

하루에 원고지 20장을 쓰는 꾸준함으로 체력과 지식을 불리며 삶을 바라보는 인사이트를 더 열어두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