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쓰메 소세키 - 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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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윤동주 - 서시)

누구나 죄를 짓는다. ‘죄’ 라고 받아들이는 선 또한 다양각색이다. ‘인간다운 삶’ 의 공존을 위해 사회에서 지정해주는 법과 규범의 울타리가 있지만, 그 울타리 외에도 사람은 자신만의 초자아 바운더리가 있다. 이걸 ‘선(線)’ 이라고 부른다. ‘선넘네’ 의 그 선이다. (interpersonal 선보다는 intrapersonal 선을 말하려고 한다.) 어떻게 보면 양심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다. 사람은 그 바운더리 내에서는 안전하다. 마음이 편안하며 어떤 행동을 해도 자기 이해가 가능하다. 그렇지만 그 바운더리에서 멀어질수록, 그리고 그 ‘선’ 이 깊고 단단하게 그어져 있을수록 ‘죄책감’ 이라는 심리적 방어기제가 작동한다. 초자아가 이드가 가진 원초적 본능에 굴복했다는 데에 대한 불안함이다.

죄책감을 느끼게 되는 트리거가 누구에게나 다를수록, 죄책감을 해소하는 방법 또한 천차만별이다.

[마음] 의 선생님은 자기 자신을 검열하는 방식으로 죄책감을 묵인했다. 털어놓는 것보다는 자기 선에서 불안감을 꿀꺽 삼키고 무덤까지 지고 가기를 택했다. 혼네와 다테마에 정신이 중요한 그 시대의 일본에서는 다른 ‘해소법’이라고는 존재하기 어려웠으리라. 다른 방법이 있었다 해도, 선생님의 초자아에서는 그 방법을 받아들일 수 없었을 것이다. 고지식한 사람들이 더러 그렇듯이, 자기가 생각한 최고의 방법 외에는 다른 방도가 없다고 생각을 했을 것이다.

선생님은 왜 죽었어야만 했을까. 좋게 말하면 자기 이야기를 남과 공유하면서 다른 사람에게 폐를 끼치기 싫었던 거고, 나쁘게 말하면 자기 자신을 특별한 사람으로 치부하는 선민의식에 취해서 그렇다. 자신은 다른 범인(凡人)들과 다르기에, 타인과의 심적인 소통보다도 자기만의 고고한 선을 지키는 것이 더 중요했던 거다.

이렇게 말은 했다만, 나는 선생님의 감정선이 십분 이해간다. 같은 ‘높은 초자아 인간’으로서 자기의 선을 지켜나가는 것은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것을 안다. 자신의 바운더리 = 자신의 프라이드였을테니. 자기가 관철해온 삶의 길이 한낱 기초적인 욕망으로 더러워졌다는 것이 너무나도 보기 싫었을 거다. 혼자만을 믿어야만 했던 삶을 살아왔기에, 다른 사람에게 기대기도 힘들었을 거다. 기대는 법 조차도 몰랐을수도 있다. 말을 하고 싶었지만 어떻게 전달을 해야 할지, 어떻게 워딩을 해야 자기의 프라이드도 유지하면서 다른 사람에게 약점을 잡히지 않을지에 대해 끊임없는 고민을 해야만 했을 거다. 그 고민을 거듭하다 선생님은 지쳐버렸고, 모든 죄악감을 자기 자신의 상자 안에 눌러담아 봉인하게 되지 않았을까.

높은 초자아 인간은 우월의식을 버려야만 한다. 알량한 우월감이 있기에 죄책감이 더 큰 누로 느껴지는 것이다. 그 우월감을 버리고 다른 사람을 동등하게 받아들이는 사회적인 창구를 열어야 한다. 선생님은 ‘나’ 에게 편지를 보냄으로서 창구를 열었지만, 그 선민의식은 못 버렸다. 끝까지 자기는 고고한 인간으로 남고 싶었던 것이다. 이해는 가지만, 그것이 정녕 최선이었을까.

보이지 않는 신에게 털어놓는 것이 아닌 이상, 일방적인 고해성사로 턴을 종료하는 게 아니고, 상대방의 답변을 듣고 수용하며 개선된 삶을 살아야 더 ‘완전한’ 인간이 아닐까. 아쉬움이 남는, 고고하고 완전하게 비춰지길 바란 선생님의 삶에 비해 너무나도 실망스러운, 감정적인 회피였다고 생각된다.